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여전히 선명하다.
문득 스치는 바람, 낯익은 바다 냄새, 그때의 햇살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마음 한편을 흔든다.
나는 가끔 그런 기억들을 꺼내 보곤 한다.
분주했던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때,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여행의 한 장면들을 다시 펼쳐 본다.
오늘, 나는 오래도록 간직해 둔 그날을 꺼내 보기로 했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났던 봄의 끝자락,
그곳에서 만난 바람과 빛, 그리고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던 특별한 하루를.
바다 냄새가 묻어 있던 그 아침
지금도 가끔 눈을 감으면 그날의 바람이 느껴진다.
몇 년 전, 혼자 떠난 봄의 끝자락 제주 여행.
아무 계획 없이 배낭 하나 메고 공항에 내려섰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숙소 창문을 열자마자 부딪힌 바다 냄새,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골목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하품을 하며 지나갔다.
나는 잠시 짐을 내려놓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오듯 늘어지게 흐르는 햇살이 발끝을 따뜻하게 적셨고, 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떠나온 실감이 났다.
그날의 나는 오래 묵혀 둔 고민들로부터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바다와 나만 남을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원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낡은 목재 표지판 하나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던 해변으로 향했다.
햇살이 스며든 골목과 낯선 사람들의 미소
해변으로 가는 길목엔 낮은 돌담들이 이어져 있었고,
담 너머로는 아직 피지 않은 수국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길가 작은 카페에서는 누군가가 방금 구운 듯한 빵을 식힘망에 올려놓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받았다.
그 순간, 카운터에 서 있던 주인장이 나에게 말했다.
“오늘 날씨 좋죠? 바람이 참 부드러워요.”
낯선 이의 그 한마디에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 묘한 따스함이 스며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작은 친절은 그렇게 오래 기억 속에 남는다.
다시 길을 나섰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한 골목에 붉은 등롱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의 마음을 전해주는 신호 같았다.
나는 휴대폰으로 몇 장을 찍었지만,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공기와 냄새, 그리고 내 안에 차오르는 감정들을
그때부터 이미 잊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노을과 함께 접힌 하루의 기억
해변에 도착했을 땐 어느새 오후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얕은 파도가 발목에 살짝 스쳤다.
나는 신발을 벗어 모래 위에 놓고, 그대로 물가를 따라 걸었다.
해가 천천히 내려앉으면서 바다는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오롯이 나를 위한 하루였구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모래 위에 앉아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손에 쥔 종이컵엔 이미 식어버린 아메리카노가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묘하게 위로가 되는 맛이었다.
땅거미가 지고, 노을이 마지막 붉은 빛을 바다에 남겼을 때,
나는 작은 일기장을 꺼내어 그날을 적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여행 중 가장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모르는 해변, 낯선 골목, 그리고 사소하지만 따뜻한 만남들.
이 기억은 내 안에서 오래도록 반짝일 것이다.”
그 날의 기록을 아직도 내 책상 서랍 안에 간직하고 있다.
가끔 지친 하루가 끝난 밤, 그 페이지를 꺼내어 다시 읽으면
그때의 바람과 빛이 내 안에 조용히 스며든다.
여전히 나는 그 해변의 모래를 발가락으로 느끼는 듯하고,
그때처럼 다시금 숨이 깊어진다.
오늘 일기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는다.
“어느 여행의 하루는 이렇게도 오래, 내 마음을 밝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