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갈수록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를 스치고, 그 소리를 따라 내 기억도 천천히 깨어난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는 거친 감촉과, 천장을 향해 뻗은 벽 위에서 느꼈던 묘한 떨림이 떠오른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클라이밍을 체험했다. 그리고 지금, 빗소리를 들으며 그 순간을 천천히 되짚는다.
창밖으로 흐릿하게 번지는 가로등 불빛, 그리고 방 안을 감싸는 빗소리. 이 고요한 밤에 나는 오늘의 벽, 오늘의 감정, 그리고 오늘의 나를 글로 남기고 싶다.
첫걸음, 젖은 흙냄새 같은 두려움과 설렘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빗방울이 언제쯤 쏟아질지 모르는 무거운 구름 아래서, 나는 낯선 클라이밍장으로 향했다. 실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까지도 마음 한구석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천장을 향해 높이 뻗은 회색 벽 위에 빨강, 노랑, 파랑의 홀드들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벽을 오르며 집중한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광경이 마치 비 오는 날 창밖의 도시처럼 낯설고도 아름다웠다.
안전벨트를 차고 초크를 손에 묻히자, 손바닥이 거칠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첫 번째 홀드를 잡았을 때의 차가운 촉감, 그리고 발을 살짝 들어 올릴 때의 심장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할 수 있어.”
누군가 내 뒤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두려움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 잔잔한 설렘이 피어났다. 비 오는 날의 흙냄새처럼, 낯설지만 어디선가 익숙한 감정이었다.
벽 위에서 들려온 내면의 목소리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홀드 하나하나를 잡을 때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다리가 떨릴 정도로 긴장되었지만, 그만큼 마음은 더 단단해졌다.
벽의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잠시 숨을 고르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바닥은 멀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높이에서 이상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 순간, 빗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실내였기에 실제로 들린 건 아니었지만, 마음속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왜 지금까지 이렇게 도전하지 못했을까?’
내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했던 나, 늘 안전한 길만 선택하던 나. 하지만 지금 이 벽 위에 서 있는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한 칸 더 위로 오르고 싶었다.
손에 남은 초크 가루가 마치 작은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려갔다. 그 가루가 공기 속에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도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빗소리가 데려온 오늘의 기억
클라이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빗방울이 거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펴서 걸음을 옮기는데, 오늘의 벽이 자꾸 떠올랐다. 벽을 오를 때의 숨결, 손끝의 거친 감촉, 그리고 그 위에서 들려오던 나만의 목소리.
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어두니 빗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 한 잔을 우려 따뜻한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약간의 뻣뻣함이 차의 온기와 섞여 묘한 감정이 되었다.
오늘의 경험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빗소리는 마치 그 기억을 천천히 닦아내듯, 부드럽게 내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아마 손바닥에 작은 상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처는 오늘의 벽과 오늘의 빗소리를 함께 간직한 채, 오래도록 나를 기억하게 만들 것이다.
오늘 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한 칸 더 오르기 위해 손을 뻗던 그 순간, 내 안의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였던 시간, 그리고 지금 이 조용한 방 안에 가득한 빗소리.
“비 오는 날의 벽, 그 위에서 만난 나.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