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갈수록 유난히 자주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무엇 하나 대단하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은 그때의 일상.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속엔 순수한 웃음과 작은 설렘이 가득했다.
가끔은 지금의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되찾을 수 없는 빛깔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그런 기억 중 하나를 꺼내 보려 한다.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시절… 교실 안에서 피어났던 사소하지만 소중했던 웃음의 한 장면을.
운동장 한켠에서 번져간 장난
그날은 봄이 오기 직전의 맑은 날이었다.
교실 창문을 열어두면 서늘한 바람이 책장 사이를 흘러갔고,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갔다.
나는 그때 내 단짝이었던 수진이와 함께 운동장 한켠에 앉아 있었다.
둘 다 그날따라 달리기보다는 구경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운동장 가운데서는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고,
공이 굴러가는 곳마다 와아—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다 갑자기 한 친구가 공을 세게 차는 바람에 그 공이 우리가 앉아 있던 곳으로 굴러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공을 붙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걸 그대로 옆에 있던 수진이 얼굴 쪽으로 튕겨버린 것이다.
“야아아!”
수진이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자,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리며 숨이 차오를 때마다,
뒤에서 수진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서! 너 진짜 가만 안 둬!”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바람이 내 뺨을 스쳤고, 운동장 전체가 우리만의 놀이터가 되었다.
교실 뒤편에서 숨죽인 웃음
쉬는 시간이 끝나고 돌아온 교실은 여전히 분주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들떠 있었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교실 맨 뒤 구석에 앉아 있었다.
수진이도 결국 따라 들어왔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내 옆에 앉아 함께 킥킥거렸다.
“야, 너 진짜 너무했다.”
“미안… 근데 네 표정이 너무 웃겨서.”
둘은 소곤소곤 얘기하며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선생님이 교탁 위에서 수업 준비를 하며 우리 쪽을 힐끗 보자,
우리는 얼른 책을 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책장 뒤로 숨겨둔 입술 끝에는 자꾸만 웃음이 맴돌았다.
그때의 교실 공기는 늘 그런 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잘한 장난, 비밀스러운 웃음, 그리고 다시금 이어지는 평범한 수업.
그 모든 것이 지금 떠올리면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길의 마음
종이 울리고, 교문을 나서는 순간의 해 질 녘 풍경도 아직 선명하다.
운동장에서 놀던 땀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고,
하늘은 노랗게 물든 채로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수진이와 나는 나란히 걸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얘기했다.
“아까 진짜 깜짝 놀랐어. 근데 너 왜 그렇게 도망쳤어?”
“그냥… 네가 쫓아오는 게 재밌었거든.”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각자의 집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내일도 봐!”
그 짧은 인사 속에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설렘이 함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몰랐다.
그런 일상들이 얼마나 빛나던 순간들이었는지,
그리고 훗날의 내가 그 시절을 이렇게까지 그리워할 줄은.
오늘 일기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는다.
“운동장에 번지던 웃음, 교실 뒤편의 속삭임, 그리고 저녁길의 따스한 빛.
그 시절의 나는 몰랐지만, 그 순간들이 내 마음을 이렇게도 오래,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